이경애 신현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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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TV는 사랑을 싣고 이경애가 출연하여 늦은 나이에 대학을 가게된 사연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경애는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하여 36세 늦깎이 대학생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준 은사를 찾았는데요. 이날 방송에서 이경애는 추억 찾기를 하며 어려웠던 당시 생활을 회상하며 팍팍했던 상황을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이경애는 어려은 가정 상황에 학창 시절 학교 매점에서도 일을 했었다고 고백했는데요. 이에 김용만은 "어릴 때 일을 했던 경험이 많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습니다. 인생의 은사인 신현돈 선생님을 만난 연극반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이경애는 "학교에서는 너무 행복했다. 연극반도 재미 있었는데 집에 가면 다시 지옥이 됐다"고 솔직하게 토로했고 이어 "연극반은 1년만 하고 못했는데 이유는 어린이대공원에서 심부름하는 알바를 해야 했기 때문"이라며 "연극반을 그만둔다고 연기를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선생님께도 연극반을 그만둔다고 했는데 이유를 물어보지 않았던 것이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이경애는 대학에 가게된 이유로 “어머니께서 2000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내게 네가 꼭 대학에 가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소원을 이뤄드리기 위해 36살 1999년에 동덕여자대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게 됐다”고 설명했는데요.  “내가 개그 콘테스트 2기에서 우승하면서 KBS 공채 개그맨이 됐다. 19살에 됐는데 내가 번 돈은 모두 형제들의 생활비로 들어갔다”고 밝혔고 “대학교 원서비가 없어서 나는 대학입학을 포기했는데 언니는 유학까지 보냈다”고 덧붙여 좌중의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경애는 늦은 나이에 수능을 본다는것 자체가 도전이었다고 고백했는데요. "나는 가족들을 16년 동안 뒷바라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널 생각하면 가슴 아파'라고 하더라"며 "나는 정작 대학을 못 나왔다. 어머니가 대학 입학을 보고 싶다고 하시더라. 36세에 대학을 입학했다"고 말했고 "오늘 찾을 분이 동덕여대 입학 티켓을 주신 분이다. 고등학교 연극반 신현돈 선생님을 찾고 싶다"며 "문제집을 다 챙겨주셔서 시험 볼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담임 선생님도 아니었다"고 전했습니다. 

이경애는 은사를 찾기에 어려움을 마주 하게 되였습니다. 신현돈 선생님이 뇌경색으로 현재 교편을 잡고 있기 않았기 때문인데요. 고군분투 끝에 이경애의 은사와의 만남은 연극 공연이 자주 열리는 혜화동 마로니에 공연에서 이뤄졌고 보이지 않는 신현돈 선생님의 모습에 이경애는 "나오지 않으셨느냐"며 눈물을 보였습니다. 한참을 공원을 배회하던 이경애는 벤치에 앉아있는 신현돈 선생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오열 하였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은사를 본 이경애의 첫 마디는 "선생님, 죄송해요"였는데요. 이어 "선생님을 만나서 고맙고 죄송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신현돈 선생님은 눈시울을 붉히는 제자를 보며 "그만 울어라, 이경애는 정말 인간 승리다"라고 위로했습니다. 

이어 신현돈 선생님은 당시에도 연극반을 끌고 갔던만큼 현재도 연극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여러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러나 뇌경색으로 쓰러져 몸이 불편한 상태라 이경애는 "건강은 괜찮으시냐"며 걱정을 했고 이에 "매일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며 따뜻하게 제자를 위로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마음을 뭉클하게 하였습니다.

이경애는 마음에 쌓인 말을 하며 회포를 풀었는데요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선생님이 부족한 애들에게 장학금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지키지 못해 마음에 쌓였다"고 고백했습니다. 신현돈 선생님은 "힘든 티를 안내서 모진 생활을 사는 줄 몰랐다, 대견하고 자랑스럽다"고 밝혔습니다.

한편 이경애는 어려웠던 힘들 시절을 회상하였는데요 "내 56년 인생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시절이 없다. 아버지는 술과 노름으로 세월을 보냈고, 어머니는 그 스트레스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며 불행했던 유년 시절을 고백했습니다.

이경애는 "어머니가 10년간 행상으로 돈을 모아 마련한 집을 아버지가 노름으로 날렸던 탓에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개그우먼이 된 이후까지 10년간 망우동 단칸방에서 일곱 식구가 살았다"며 말했고 이어 "아버지의 노름빚으로 집을 날리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는 정신 이상 증세를 보이며 죽음 직전까지 다다르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를 말리며 돈 많이 벌어 호강시켜 드릴 테니 제발 죽지 말라고 빌었다. 그때 이후 어머니를 위한 삶을 살았다"며 눈물로 당시를 회상하였습니다.

5남매 중 셋째였던 이경애는 다른 형제들보다 일찍 집안 형편을 헤아리고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특히  "초등학교 졸업후 학비가 없어 중학교 입학을 하지 못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부모님이 나를 입양 보내려 했다"고 밝혀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이경애는 입양 갈 뻔 했던 일을 겪은 이후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기로 다짐해 수세미, 코코아 등 방문판매를 하며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한 번은 아파트에서 수세미를 팔다 경비에게 잡상인으로 걸려 4시간 무릎 꿇고 벌을 받았다"며 "물건도 돌려주지 않아 밤 8시까지 벌을 준 경비처럼 나쁜 어른에게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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